〈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1884-1888년, 일리야 레핀(1844-1930), 캔버스에 유채, 160.5×167,5,㎝ 트레챠코프 미술관, 모스크바.

ㆍ일리야 레핀의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

삶의 모습은 천만 가지다.

오랜 유형을 끝내고 막 돌아온 혁명가와 그를 맞이하는 가족들. 그들 사이에는 서먹한 세월의 강물이 흐른다. 천륜은 누구도 떼어낼 수 없는 무엇이지만 그 인연이 또 다른 무게가 되어 서로의 가슴에 생채기를 낸다.

19세기 러시아의 많은 지식인들은 차르의 전제 정치에 항거, 가정을 떠나 혁명지를 전전한다. 서로의 생사도 알지 못한 채 혁명가는 대의를 위한 삶을, 고향의 가족들은 묵묵히 일상의 삶을 그렇게 서로를 잊은 듯 각자의 인생을 살아간다. 누구에게도 잘못은 없다. 시대가 만들어내는 또 다른 형태의 슬픔일 뿐이다.

어느 누구도 예견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혁명가 아버지의 얼굴.

하녀의 안내를 받으며 가족들이 모여 있는 거실로 오래전에 집을 떠난 남자가 들어선다. 긴 유형생활을 끝내고 지친 영혼과 병약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설렘, 반가움, 낯섦, 긴장감, 미안함 등을 품은 복잡한 심경의 그 일 거다. 그렇게 삶의 무게에 찌든 혁명가 뒤로 햇살이 화사하게 비춘다. 사진의 역광처럼 밝게 비추는 빛 때문에 우리는 컴컴한 남자의 표정을 명확히 읽을 수 없다. 오랜 세월을 혁명가로서, 죄수로서 고단한 삶을 살았을 지난 시간을 어찌 하나의 표정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혁명가로서, 아들로서,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의 복잡한 심경을 이렇게 화사한 햇빛 속에 묻어 버려 그림을 보는 우리로 하여금 상상케 만드는 레핀의 천재성이 눈부시다.

집안의 주인이라는 이 초라한 남자를 처음 보나 보다. 경계하는 하녀의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다.

아들을 맞이하는 어머니의 뒷모습.

일 년 삼백육십오일 노심초사 아들을 기다렸을 어머니는 엉거주춤 일어나 아들에게 다가서려 한다. 세월이 내려앉은 구부정한 어깨 위로 아들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과 반가움이 묻어난다.

아내는 남편의 예고치 않은 귀환에 피아노를 치던 손을 멈추고 놀란 기색으로 그를 바라본다. 남편을 향한 눈빛이 무척이나 메말라 있다. 보통 유형지로 떠난 혁명가들은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여서 그의 생사를 확인하지 못한 어머니와 아내는 이미 상복 같은 느낌의 검은 옷을 입고 있다.

아이들의 표정.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또렷이 남아있는지 아들의 얼굴에는 반가운 기색이 역력하다. 아마 할머니에게서 익히 들어 혁명가로서의 아버지를 존경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린 딸아이는 낯선 남자의 등장에 잔뜩 겁을 먹었다. 딸아이가 아주 어릴 때 아니면 태어나기도 전에 아빠는 혁명을 위해 떠났나 보다. 딸아이는 아빠와의 첫 만남이 낯설 뿐이다. 천만가지 표정 예술의 마술사 레핀 손에 탄생한 세상사 한자락이 너무도 절묘하다.

작가는 그림 전체에 밝고 환한 빛을 주고 있다. 우울하고 무거운 주제의 그림이지만 그림 전체를 감싸는 밝은 빛을 보며 가족의 미래가 어둡지만은 않을 것을 기대하게 한다.

삶은 여러 모습이다.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갈 때가 많다. 그래서 삶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아야 한다 우울한 날들을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는 것이 우리 인생이라 그림이 가르침을 준다.

레핀이 활동하던 19세기 러시아는 풍속화가 주를 이루던 때다. 이 시기 화가들은 현실을 반영하지 않는 그림은 가치가 없다고 단언하고 민중들의 눈과 귀가 되어 러시아의 아픈 시대상을 화폭에 고스란히 담는다. 그렇게 그림의 힘으로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스토리텔러가 되어 러시아의 비참한 현실을 날카롭게 고발하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삶에 지친 마음들을 그림으로 어루만진다.

일리야 레핀(1844-1930), 러시아의 화가. 19세기 러시아 사실주의 회화의 거장이라 불린다. 중량감 있는 구성과 극도의 긴장감이 흐르는 화면 속에 러시아의 역사와 민중의 삶을 담았으며, 예리한 사색과 관조에 의거한 내면의 심리 묘사가 탁월하다. 주요 작품으로 볼가 강의 배 끄는 인부들(1870~1873),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1884~1888), 톨스토이 초상화(1887), 터키술탄에게 편지를 쓰는 자포로쥐에 카자크들(1880~1891) 등이 있다.

▲ 김희은

-갤러리 카르찌나 대표

-<소곤 소곤 러시아 그림 이야기>(써네스트) 저자

-아트딜러 및 컨설턴트

-전시 기획 큐레이터

-러시아 국립 트레챠코프 미술관 러시아 국립 푸쉬킨 박물관 도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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