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흰 바람 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백석<흰 바람벽이 있어> 중에서

‘판’ 1899년, 미하일 브루벨(1856-1910), 캔버스에 유채, 124х106.3cm, 트레챠코프 미술관, 모스크바
‘판’ 1899년, 미하일 브루벨(1856-1910), 캔버스에 유채, 124х106.3cm, 트레챠코프 미술관, 모스크바

절대 고독 '판', 사랑을 잃고 우네

아르카디아 산자락에 사는 요정 쉬링크스는 아르테미스를 따르며 사냥을 즐긴다. 천사 같은 그녀를 보고 우락부락한 얼굴에 염소 다리와 뿔을 가진 괴물 판은 한눈에 사랑을 느낀다.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쉬링크스에게 열렬히 고백해 보지만 공포의 꽥꽥거림으로 나타나는 판의 목소리에 요정은 필사적으로 도망만 다닌다(영어의 panic 이란 단어는 이 pan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하니 판은 존재만으로도 공포 그 자체인 괴물이었나 보다).

그런 판의 구애에 진저리 난 쉬링크스는 결국 자신을 포기해 버리고 갈대로 변해 버린다. 사랑을 잃어버린 판의 한숨 소리가 갈대 속을 지나 가냘프고 애끊는 소리로 변하니 그 갈대를 엮어 만든 피리는 천상의 아름다운 소리로 사람의 마음을 끌게 된다. 요정의 이름을 따 '쉬링크스'라고 불리는 판의 피리인 팬 플루트는 그 애절한 음색으로 우리의 마음을 촉촉이 적셔 준다. 쓸쓸한 음색만큼 슬픈 사연의 악기다.

살다 보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참 많다. 내 속에 너무 많은 내가 다양한 목소리로 싸우지만 그들의 언어는 세상 밖으로 나올 수가 없다. 어떤 형태의 옷을 입고 세상과 맞이해야 할 지 몰라 마음 속 테두리에 갇혀 안으로만 잦아들게 된다. 그럴 땐 마음의 쓸쓸함, 고독함을 바위처럼 웅크린 채로 안으로 곰삭아야 한다. 그림의 판처럼 말이다. 그래야 내 안의 쓸쓸함은 온전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게 사랑이든, 슬픔이든, 행복이든, 절망이든.

모두가 절대 고독이란 모습으로 커다란 덩어리가 되어 마음속에 집을 짓게 된다. 브루벨의 <판>을 보면 그런 내 안의 절대 고독이 투영된다. 다가가 판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토닥토닥 하며 쓰다듬고 싶어진다. '널 이해할 거 같아’하면서 말이다. 판의 근원적 외로움 또한 내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쓸쓸함과 같은 모양이다. 사랑을 잃고 홀로 주저앉은 판의 웅크림에서, 그의 텅 빈 눈빛에서, 둥근 어깨에서, 그리고 한 손에 꽉 움켜 쥔 요정의 분신에서 우리의 쓸쓸한 자화상을 보게 된다.

현실적 외로움과 정신적 어려움을 고귀하게 지켜내겠다는 '백석'의 굳은 의지도 브루벨의 '판'이 웅크리고 있다. 백석 또한 자신의 쓸쓸한 내면을 그의 시적 언어로 고백한다. 백석과 판은 서로 통하는 무언가가 있다. 우린 그들을 읽으며 공감하며 내 안의 나와 대화를 나눈다. 그렇게 시와 그림은 우리 인생에 최고의 동반자가 되는 거다. 그리고, 백석의 시적 자아와 브루벨의 판이 이렇게 질문 하는 듯 하다. "여러 현실적 어려움 앞에 정신적 고결함을 너는 어찌 지킬 것이냐?"라고 말이다.

브루벨, 미하일 (1856-1910): 화가. 무대 디자이너.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키예프의 키릴로프스키 수도원의 벽화를 복원하는 일을 하고, 모스크바로 나와 마몬토프의 오페라극장에서 무대미술을 담당, 일련의 대장식(大裝飾) 패널을 완성하기도 했다. 1889년 아브람체보 파에 가입하여 많은 전시회에 참여했다. 러시아 미술사에서 사실주의 화풍에서 러시아 아방가르드, 모더니즘으로 넘어가는 교량 역활을 한 작가로 러시아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화가다. 신화 ·성서 ·영웅서사시와 문학작품을 주제로 한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그 강렬한 개성과 대담한 구도와 필치 등으로 독자적인 미적 세계를 확립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악마>(1890), <술탄왕 이야기>(1900), <라일락>(1900) 등이 있다.

▲김희은

-갤러리 카르찌나 대표

-<소곤 소곤 러시아 그림 이야기>(써네스트) 저자

-<미술관보다 풍부한 러시아 그림이야기>(자유문고) 저자

-아트딜러 및 컨설턴트

-전시 기획 큐레이터

-러시아 국립 트레챠코프 미술관 러시아 국립 푸쉬킨 박물관 도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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