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엄마학교협동조합 이사장
김정은 엄마학교협동조합 이사장

그녀는 40대에 금슬 좋던 남편을 잃었다. 늘 과로에 시달리던 남편이 갑자기 간암 판정을 받고 입원한 지 일 년도 못 넘기고 그예 떠나버린 것이다. 젊은 나이에 그런 청천벽력을 어찌 견뎠을까. 남은 두 아이들을 키워내야 하는 막중한 임무 때문에 다니던 직장을 접고 과감하게 시장 통에 미장원을 차렸다고 했다. 뷰티산업 분야의 대기업에 다니면서 익힌 능력을 활용해 좀 더 생계 모드로 전환할 필요가 생겨서다.

그런 그녀를 딸아이 학부모 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엄마들이 둘러 앉아 사는 이야기를 한참 돌아가며 하던 판이었다. 반장 엄마였던 그녀 차례가 돌아오자, 자주 참석 못해서 미안하다며 덤덤하게 처음 보는 우리들에게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왁자지껄하던 엄마들이 괜히 미안해져서 말문이 다 탁 막혔던 기억이 난다. 이후로 머리 만질 일이 생기면 그녀의 미장원으로 들리곤 했다. 머리 하는 동안 밀린 수다 한바가지 나누며 헤어지곤 했었는데 종일 미장원 안에만 있으면서도 어찌 그리 세상 보는 눈이 밝고 넓은지 매번 감탄스러웠을 정도다.

멀리 이사를 나온 후엔 자연히 나의 발걸음도 뜸해졌었다. 제각각 아이들 행보도 달라져 서로 소식 전할 일이 없었는데 어느 날 문득 연락이 왔다. 이제 미장원 접었다고. 모처럼 얼굴이나 볼 겸 드라이브나 가잔다. 그래서 우리 둘은 난생 처음 미장원이 아닌, 임진각까지 자동차를 타고 내달리는 데이트를 감행했다. 그 사이 밀린 이야기가 많았다. 그새 그녀의 두 딸이 대학 졸업하고 취직을 했더란다. 경제적 중압감에서 겨우 놓여나게 되니 이젠 다른 게 보이더란다. 쟤네들 결혼시키면 함께 오붓하게 보낼 기회도 없을 텐데 이 와중에 한 푼 더 벌면 뭐하나 싶어 고민 끝에 가게를 접었다고 한다.

그 다음 날로 당장 아이들과 부산 여행을 떠나 마음껏 놀았다니 상상만 해도 그 기분을 느낄 것만 같다. 이어서 6개월간은 쉴 새 없이 자기 혼자 여행을 다녔단다. 참았던 일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 폭발력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아이들이 결혼할 때까지는 좀 더 함께 시간을 보내는 데 집중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세상 구경을 다니면서 다음 행보를 준비 해 볼 작정이란다. 이제야말로 돈의 구속에서 헤어나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을 하면서 살 차례라며. 나는 그녀의 멋진 결정에 힘찬 박수를 보내주었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는 구절이 얼마나 어울리는 그녀란 말인가. 그런 와중에 그녀에게서 듣게 된 단어 하나가 내내 귓가를 맴돌고 있다.

“가게를 접고 막상 놀아보니 대비를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하나 놓친 게 있습디다. 어차피 평생 한 가지 일만 하며 살 수는 없잖아요. 시기와 형편에 따라 사는 모드를 전환하려면 충분한 재충전과 탐색이 필요하죠. 그럴 동안 버틸 수 있도록 생계 대책은 세워놨는데 닥쳐보니 그게 다가 아니에요. 그 시간에 그냥 쉬는 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제대로 시간을 잘 활용해야 의미가 생기지요. 그러기 위해서 따로 투자비용이 드는 건데 그 생각을 미처 못 했어요. 사람이 벌다가, 안 벌면 그것만으로도 위축되어 예상 못한 비용을 내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시간은 되는데 갑자기 자금줄이 조이는 거라. 그 준비를 미리 못한 게 너무 아쉬워요.

그래서 저는 요새 사람들 만날 때마다 무조건 말해줘요. 은퇴통장을 따로 하나 만들라고. 그 은퇴통장으로는 생계에 매여 여태 못해봤던 거, 하고 싶지만 차마 지를 수 없던 것을 충분히 누리면서 자기를 위로하는 데 쓰라고. 그래야 또 그 다음 행보를 내딛을 힘과 아이디어가 고인다고요.“

공감을 하면서도 당장 오늘을 살아가는 일에 허덕대고 있는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가는 한가한 소리 한다고 욕만 먹을까봐 잠자코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다. 만약 나에게도 옛날부터 은퇴통장이라는 게 있었더라면, 사는 데 지칠 때마다 지름신을 영접하여 언 발에 오줌 누듯 찔끔찔끔 헛돈을 쓰던 일이 훨씬 줄어들지 않았을까 싶어서다. 모르긴 몰라도 그럴 때마다 한 푼 두 푼 비밀리에 돈을 모으면서 짜릿짜릿 했을 거다. 은퇴 통장, 그거 생각해볼수록 굿 아이디어다.

▲김정은

-엄마학교협동조합 이사장

-독립출판 섬 대표

-오지랖통신 발행인

-<엄마 난중일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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