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은의 소곤 소곤 러시아 그림이야기]⑳바실리 ‘트로피닌의 소녀들’
[김희은의 소곤 소곤 러시아 그림이야기]⑳바실리 ‘트로피닌의 소녀들’
  • 김희은
  • 승인 2019.06.27 09: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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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자수를 놓는 여인’1826년, 바실리 트로피닌(1776-1857),캔버스에 유채, 81.3 х 63.9cm, 트레챠코프 미술관, 모스크바
’황금자수를 놓는 여인’1826년, 바실리 트로피닌(1776-1857),캔버스에 유채, 81.3 х 63.9cm, 트레챠코프 미술관, 모스크바

눈이 예쁜 소녀들이 우릴 바라보며 말을 건넨다. 일하던 손을 멈추고 얼굴을 돌려 부드럽고 다정다감한 눈빛을 보낸다. 그리고 자기에게서 시선을 떼지 마라 속삭인다.

잘 익은 복숭아 같은 볼에 분홍빛 생기를 넣고,

예쁘게 부풀어 오른 입술에 살짝 붉은빛을 물들이며,

미소 짓는 도톰한 입매에 새침함을 덧칠하고,

적당히 솟은 콧날로 얼굴 전체에 귀품을 입힌다.

매끈한 소녀의 피부는 환한 빛을 받아 더욱 건강하게 빛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작가는 빛을 뿌리고 생명을 넣어 소녀들의 맑은 눈동자를 그렸으리라.

선하고 순수한 눈매를 그리기 위해 세밀한 붓 터치를 반복했을 거다.

그렇게 탄생한 트로피닌의 소녀들은 아주 매끈하고 싱그럽다.

작가의 손에 순차적으로 살아났을 소녀들의 생명력을 상상하며 그림을 본다.

바로 눈앞에서 숨 쉬는 듯 생생함이 느껴진다.

손으로 만지면 체온이 느껴질 듯 그림이 따뜻하고, 소녀들이 품어내는 풋풋함이 화폭 전체를 생명력 있게 메운다.

’황금자수를 놓는 여인’1826년, 바실리 트로피닌(1776-1857),캔버스에 유채, 81.3 х 63.9cm, 트레챠코프 미술관, 모스크바
‘레이스 뜨는 여인’ 1823년, 바실리 트로피닌(1776-1857),캔버스에 유채, 74,7 х 59,3 cm 트레챠코프 미술관,모스크바

인간 개개인의 심성 표현을 중시한 러시아 화가들은 초상화를 그릴 때 모델의 표정과 내면 정서를 부각하는 데 중점을 둔다. 트로피닌은 귀족들의 전유물인 초상화에 과감히 평민 소녀를 모델로 등장시키고 일하는 모습 속에서 발현되는 일상의 아름다움을 진실되게 표현한다.

소녀들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포착해 내는 트로피닌의 관찰력과 표현력이 정말 대단하다. 서양 미술사 전체를 통틀어 트로피닌의 소녀들만큼 순수하고 깨끗하고 어여쁜 초상화가 또 있을까? 감히 최고라 말하고 싶다.

그러나 트로피닌의 화가로서의 삶은 그리 평탄치 않았다. 19세기까지 봉건 농노제가 유지되었던 러시아는 귀족과 농노 이 두 계급으로 분리된 사회구조였다. 당시 귀족의 소유물이었던 농노는 자유로이 공부할 수도 여행을 다닐 수도 없었으며, 지주들은 농노를 체벌로 다스릴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불합리한 신분제도를 가진 러시아였다.

트로피닌 또한 농노 출신이다. 다행히 트로피닌은 지주의 허가로 뻬쩨르 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 정규 미술 교육을 받는다.

이때 트로피닌의 천재적 재능이 빛을 발해 180년 미술 아카데미 전시회에서 예카테리나 2세의 극찬을 받는다. 당시는 황제의 말 한마디가 요즘의 그 어떤 상보다 가치가 있었을 거다.

하지만 트로피닌의 급성장을 두려워한 주인은 졸업도 하지 않은 그를 고향으로 불러 들이고 미술교육을 중단시킨다. 천재적 재능을 가졌으나 트로피닌은 그렇게 화가의 꿈을 접고 지주의 뜻에 맞춰 살아가게 된다. 꿈을 펼치지 못하는 천재화가 트로피닌의 시골에서 삶이 얼마나 무미건조 했을까.

그러던 트로피닌은 주위 지인들의 끊임없는 부탁으로 44세가 되어 신분 해방이 이뤄지고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화가는 인고의 세월을 보냈겠으나 농민으로 보낸 시간들이 그림에 깊이 배어있다. 농노들에 대한 깊은 이해와 따뜻한 배려가 예술로 승화되어 있다. 노동하는 민중, 농노에게도 아름답고 가치 있는 인간으로서 삶이 있음을 여러 그림들을 통해 세밀하게 표현한다.

’황금자수를 놓는 여인’1826년, 바실리 트로피닌(1776-1857),캔버스에 유채, 81.3 х 63.9cm, 트레챠코프 미술관, 모스크바
‘실 잣는 여인’1820년, 바실리 트로피닌(1776-1857), 캔버스에 유채, 60,3 х 45,7 cm, 트레챠코프 미술관, 모스크바

부드럽고 은은한 아름다움. 예술 작품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작가들의 본성이나 내면을 읽어낼 수 있다. 트로피닌은 분명 선한 본성을 가졌을 거다. 작품에서 그의 내면이 우러나온다. '아름다운 것이 가장 선한 것이다'라고 말한 도스토옙스키의 가르침처럼 예술을 향유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아름다움에 대한 감흥을 받아 스스로 선해지는 데 있다. 트로피닌의 소녀가 충분히 나를 선하게 만든다.

바실리 트로피닌( 1776~ 1857) 농노 출신으로 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에서 공부하였다. 초상화가로 이름을 떨쳤고 특히 <푸시킨 상>(1827), <레이스를 짜는 여자>(1823)가 유명하다.

▲김희은

-갤러리 카르찌나 대표

-<소곤 소곤 러시아 그림 이야기>(써네스트) 저자

-아트딜러 및 컨설턴트

-전시 기획 큐레이터

-러시아 국립 트레챠코프 미술관 러시아 국립 푸쉬킨 박물관 도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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