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엄마학교협동조합 이사장
김정은 엄마학교협동조합 이사장

지난 열흘은 어영부영 서울을 떠나 바다 구경을 하면서 지내다 돌아왔습니다. 늦은 태풍이 지나가는 시월 초에 무심히 달력을 넘겨보다가 깨달았지요. 앞으로 보름간 공식 일정이 아무것도 없다는 걸요. 공식 일정이란 제가 꼭 참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약속을 의미합니다. 한가한 틈에 만나기로 했던 친구와의 약속이 중간 어디쯤 잡혀 있었지만, 그 정도야 서로 양해를 구해볼 수 있는 문제니까요. 갑자기 이번 기회를 놓치면 영영 여행을 못 떠날 할 것처럼 조급해지더군요. 친구와의 약속을 미루고 무조건 김포공항으로 달려갔습니다. 여행 기분을 제대로 내려면 뭐니 뭐니 해도 역시 비행기죠.

여행 핑계는 공항으로 가는 길에 급하게 만들어냈습니다. 이번 기회에 여름 내내 날짜를 잡을 수 없던 그녀 농장으로 찾아가 인터뷰를 하자, 머무는 동안 기숙사에서 지내는 아들 얼굴이라도 한번 보자, 오는 길에 공항면세점에서 똑 떨어진 화장품이라도 하나 사자 같은 것들 말이죠. 사실 그런 핑계가 굳이 필요 없을 만큼 여행 가방 안에 이미 노트북이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조만간 마감 경고등이 켜질 일감이 잔뜩 들어있는 그 경이로운 신문물 말이에요. 무엇보다 그 일을 제 시간 안에 해내기 위해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던 참이었습니다.

제주 중산간 숙소에 짐을 풀고 별이 초롱초롱한 밤하늘을 감상하며 마당을 서성이는 동안, 여행을 떠나온 실감에 짜릿해졌습니다. 뉴질랜드 남쪽 끝 스튜어트 섬에서 만났던 은하수가 흐르는 하늘은 아니었지만 한 시간 만에 서울을 벗어난 제가 자유롭고 평화로운 기분을 느끼기에는 충분했지요. 그만큼 넓고 까맣고 고요한 하늘이었어요. 서울은 늘 복잡하고 번잡스럽다고만 생각했지 그렇게 시끄럽다고는 잘 느끼지 못했나 봐요. 어디에서 들려오는지도 모르는 도시의 웅웅거리는 소음이 일제히 사라진 적막한 고요가 선물처럼 다가오더니 제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제주에서 돌아오자마자 연이어 안면도로 향했습니다. 두 번째 인터뷰 대상자를 그곳에서 만나기로 했었거든요. 그쪽 해변에 자리 잡았던 리조트가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을 앞두고 회원들에게 특별한 조건으로 숙박권을 제공했던 모양이에요. 어차피 어딘가에 묵으며 일하려는 거면 아예 이곳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하더군요. 그녀의 배려 덕분에 인터뷰를 마치고 난 후에도 닷새나 더 이곳 독방에 머물며 컴퓨터 작업을 할 수 있는 호강을 누렸습니다.

컴퓨터 자판에서 눈을 들어 창밖을 바라볼 때마다 시원하게 펼쳐진 바다의 잔잔함이 또 그렇게 좋더군요. 책상에서 기지개를 켜고 근처 맛집을 검색해 하루에 하나씩 다녀오기도 하고 노천 해수탕에서 낙조를 바라보기도 하고요. 몸은 종일 열심히 일하는데 마치 여행 온 사람처럼 놀고 있는 기분이었어요. 그렇게 며칠 지내다 보니 몇 년 전 오스트리아 빈에서 3주일간 보냈던 시간이 떠올랐습니다. 그때도 하늘이 보이는 아파트호텔 꼭대기 방에서 종일 컴퓨터 하나 놓고 씨름하면서 지냈거든요. 이글이글한 태양이 한풀 꺽이는 오후가 되면 슬렁슬렁 나가 놀았지요. 미술관도 둘러보고 음식점도 가고요. 앞으로도 꾸준히 이런 방법을 개발하면 좋을 거 같아요. 이런 걸 워케이션(workation)이라고 한대요. 일(work)과 휴가(vacation)가 합쳐진 신조어지요. 이제부턴 좀 이렇게 놀멘놀멘 살아보려고 합니다.

▲김정은

-엄마학교협동조합 이사장

-독립출판 섬 대표

-오지랖통신 발행인

-<엄마 난중일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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