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엄마학교협동조합 이사장
김정은 엄마학교협동조합 이사장

해가 바뀐다고 해도 이어서 오는 해가 지금과 다를 리도 없건마는, 사람끼리의 약속이라는 게 뭔지 저도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을 채비에 한동안 분주했습니다. 지난 한 해 수선을 떨며 벌여놓기만 하고 일일이 챙기지 못했던 수많은 인연이 하나 둘 생각났습니다. 굳이 착한 일을 좀 더 해서 산타할아버지 선물을 받아내려는 욕심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조금 한가해진 틈을 타 ‘사람 노릇’이라는 걸 해보려고 여기저기 인사 약속을 잡아두었습니다.

요즘은 시간을 툭 터놓고 만나는 사람이 점점 적어지는 것 같아요. 고등학교 때 읽었던 책 ‘모모’가 생각납니다. 욕심 때문에 시간을 저당 잡혀놓고도 효율적으로 사는 것처럼 허둥대는 책 속의 인간 군상이 마치 지금의 저인 것만 같아 씁쓸합니다. 옛날 같았으면 오롯이 만나 이야기할 새 없는 거대한 송년 모임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텐데 올해에는 몇 군데 참가비까지 보냈습니다. 단체를 맡아 간간이 공식 행사를 주관하다 보니 알게 되더군요. 이럴 때 기꺼이 시간을 내서 와주는 사람들이 얼마나 고마운 줄요.

그러느라 12월 한 달을 빽빽하게 마무리하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시아주버님이 가족 대화창에 뜬금없이 나타났습니다. ‘이번 주 토요일 아버지 제사인 것은 다들 알지요?’라는 한 마디. 어머 어머나 이걸 어째요. 까맣게 몰랐어요. 시부모님이 살아계실 때는 질펀한 대가족주의 문화가 살아있어 주말마다 온 식구가 모였더랬지만 이젠 정말 옛날이야기가 되었거든요. 아버님도 나 죽고 나서 제사상 받을 생각 없으니 살아있을 때나 잘 모시라면서 큰소리를 땅땅. 평생 모실 제삿날을 미리 다 땡겨 쓰셨지요. 그렇다고 막상 돌아가시니 제사를 안 지내기도 그렇더라고요. 하는 수 없이 돌아가신 날 언저리의 주말을 제삿날로 정해 모두 함께 모이고 있었어요.

저는 은근히 이게 참 불만이에요. 왜 돌아가신 날을 기념해야 할까요? 차라리 아버님 탄생일에 모였으면 좋겠어요. 굳이 달력에 표시를 안 해도 수십 년 함께 축하를 주고받던 생신에는 아버님 생각이 저절로 떠오르는데 비해서 돌아가신 날은 아무리 기억을 하려 해도 가물가물 잊어버리기 일쑤거든요. 뭐 좋은 날이라고 그렇게 날짜까지 기억해야 하는지 이해가 안되더군요. 창창하게 유교 의식을 지켰던 집안도 아니었어요. 시부모 두 분 다 막내들이어서 살아계셨을 때도 남들 하는 제사 흉내만 겨우 내셨지, 굳이 거기에 깊은 의미를 두는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후손들이 그걸 또 따라 해야 하니 깝깝함만 남는 거지요.

도포 자락 휘날리며 선산을 휘돌고, 조상님 제삿날 지방을 붓글씨로 일필휘지하던 친정아버지는 형식에 얽매이지 말라며 제사 의식을 당대에 없애버리셨는데, 그보다 제사에 관심이 없으셨던 시댁 어른들은 어쩌다 보니 그럴만한 계기가 없었던 거예요. 어쩔 수 없이 주말에 잡혀있던 송년 모임을 취소하고 전이나 좀 부쳐서 가봐야겠어요. 그 집 식구도 아니고 더구나 맏며느리도 아닌 제가 앞으로 제삿날 모이지 말고 탄신일을 기념했으면 좋겠다고 의견을 내면 너무 발칙한 일이 되려나요? 입이 근질근질해서 죽겠습니다.

▲김정은

-엄마학교협동조합 이사장

-독립출판 섬 대표

-오지랖통신 발행인

-<엄마 난중일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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