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호 한국공감소통연구소 대표
윤영호 한국공감소통연구소 대표

사람은 정말로 소중한 것을 얻게 되면 순간적인 기쁨에 이어 곧바로 뒤따라 오는 것이 바로 두려움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잃어버릴까 봐서 그렇다. 기뻐야만 할 텐데 왜 이렇게 역설적인 현상이 일어나는 것인가? 그것은 인간이 영원을 갈망하고 사모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그래서 행(幸)인지 불행(不幸)인지는 몰라도 사람은 무상함과 허무함을 동일한 것처럼 느낀다. 무상(無常)하다는 말의 다른 표현은 변(變)한다는 것이다. 항상 일정하게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뜻이다. 생물의 뚜렷한 특징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길게 보면 무 생명체일지라도 변하지 않는 것은 이 땅에 없다. 변하지 않는 것은 오로지 “영원하다”고 하는 개념일 뿐이다. 그런 상상은 피조물 세상을 떠나 시간의 범주를 초월한 신의 영역에서만 실존적 의미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인간 세상에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법칙, 즉 객관적으로 “변하는 것” 과 주관적으로 “허무하다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개념임을 알 수 있다.

알 수 없는 미지의 세상을 경험하며 여행하는 것이 인생이라면 삶은 한순간도 동일한 조건과 동일한 위치로 복귀하지 않는다. 마치 비행기를 타고 갈 때 기내에서는 같은 공간 속에 위치한다고 착각하지만 비행기 자체의 좌표는 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행하고 있는 지구 대기권 자체도 자전과 공전을 지속하는 가운데 우주를 떠돌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외부조건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나약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인생여행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결코 출발점으로 되돌아 올 수 없는 편도여행이다. 왕복티켓이 없는 탐험여행을 하면서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크고 작은 사건들과의 만남이다. 우리는 조상 때부터 커다란 사건을 맞닥뜨릴 때마다 그에 상응하는 전환점이 생겼고 삶의 행태에 혁명과 같은 변화가 있었음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

불의 발견과 사용은 인간으로 하여금 육식을 원활하게 하였고, 언어와 문자의 발견은 사물의 개념화를 통해 많은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였으며 철기도구를 만든 사건은 생산성의 급격한 상승과 자본축적으로 이어져 하늘의 뜻을 독점하는 전통적 군왕제도를 뒤바꿔놓았다. 반도체의 발전은 인공지능과 컴퓨터를 출현시켰고 기존의 타자기를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커다란 우주 운석이 지구와 충돌한 사건은 공룡이 지구상에서 더 이상 살수 없는 환경을 만들어 씨를 말렸다고 한다. 페스트와 같은 세계적인 질환은 백신과 항생제의 발전을 촉발했으며 핵 물질의 발견은 상상을 초월하는 에너지공급을 가능케 하기도 하고 공룡이 자멸했던 것처럼 인간도 공멸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불러왔다. 1,2차 세계대전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에 커다란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우리의 삶의 양태는 그에 상응하는 정도로 크게 변해왔다. 비유컨대 50년 전 딱지치기나 구슬치기를 하며 자라던 아이들과 지금 컴퓨터 게임을 하면서 자라는 아이들은 모습만 같은 사람일 수 밖에 없다. 문화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이번 코로나19라는 변종 바이러스의 출현 사건은, 이른바 제3차 대전이라 할 만큼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자존심 높던 선진국도 이 사건에 무력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니 말이다. 바이러스와 관련해서 유례없는 재정정책도 쏟아지고 있다. 생존의 문제 앞에서는 이념이나 사상과 제도는 뒷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바이러스 환자가 줄어든다고 해도 향후 진행 양상과 결과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속단할 수 없는 미지의 사건이다. 바이러스가 처음 퍼지기 시작할 때는 결국 한 사람으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거에 누렸던 행복을 그리며 변하지 않는 세상을 꿈꾸지만 그건 꿈일 뿐이다. 우리는 지금 끊임없이 다가오는 변화의 물결을 파도타기 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괴질 재앙 위협을 받는 우리는 좌절하고 향수에 젖어 허무해야만 할 것인가?

영원할 수 없는 세상을 살면서 너무 영원하려 하지 마라. 영원한 것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이 순간, 이 찰나가 그토록 소중한 것 아닌가? 주어진 이 시간을 경탄하면서 조용히 음미해보라. 출구가 보이지 않는 어둠이라고 너무 당황하지 마라. 갑자기 극장에 들어가 눈앞이 캄캄할 때는, 오히려 눈을 감고 지긋이 기다렸다가 눈을 뜨면 곧 앞이 보이는 것을 경험하지 않았는가? 변하는 세상은 변화를 외면하는 인간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비대면(非對面)의 세상에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 그동안 남만 힘주어 비판했던 눈을 돌려, 힘을 빼고 내면의 나를 돌아보게 하는 하늘이 준 사랑 처방의 시간일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우리가 살던 방법이 정상이 아닐 수도 있다. 관점을 바꿔 회복의 기회로 삼아보자.

▲윤영호

한국공감소통연구소 대표

‘마음감옥에서 탈출하는 열쇠꾸러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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