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현대 작가전'의 대표작인 미하일 쿠가츠 작품 '먼 길'(2014년 71x101cm)이 관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사진=최희주 기자

[소셜타임스=최희주 기자]

어디로 가려는 걸까. 누구를 기다리는 걸까. 오솔길을 지나고 험한 다리를 건너 마침내 큰 길에 선 여인. 표정이 다부지다. 새로운 출발을 각오하는 것 같다. 아쉬움인 듯 기쁨인 듯 묘한 감정도 엿보인다. 지나온 길, 나아갈 길. 넓고 쭉 뻗은 희망의 길이 여인을 토닥인다.

러시아 작가 미하일 쿠가츠(81)의 ‘먼 길’이라는 작품이다. 미하일 쿠가츠는 러시아 사실주의 전통을 잇는 최고의 작가다. 국내에서 전혀 볼 수 없었던 작품이다. 러시아 대가의 작품을 국내에서 감상할 수 있다는 건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러시아 현대 작가전’이 오는 7월 21일까지 인사동 아라아트센터에서 열린다. 한국에서 최초로 열리는 자연주의 러시아 작가전이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가 9명의 작품 128점을 선보이고 있다.

이 전시회는 러시아 그림 전문 ‘갤러리 까르찌나’ 김희은 대표가 15년을 공들여 마련했다.

개막 첫날. 기대 이상의 ‘대박’이다. 전시장은 관객들로 붐볐다. 코로나19가 완전히 종식되지 않은 탓에 관객이 뜸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시 준비기간이 길었던데다 그림을 어렵게 들여왔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러시아 그림을 한국에 선보이기 위해 15년을 차근차근 준비했다”면서 “개막 첫날부터 정말 많은 관객들이 찾아주셔서 감사한 마음”이라며 울컥했다.

'러시아 현대 작가전'을 마련한 갤러리 까르찌나 김희은 대표가 쿠가츠의 '먼 길' 옆에서 그림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갤러리 까르찌나 김희은 대표가 쿠가츠의 '먼 길' 옆에서 작품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최희주 기자

이번 전시회를 열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지난 3월 열기로 했던 전시가 코로나19로 인해 여러차례 연기됐다. 추진하는 과정에 전시장 대관부터 작품을 국내에 들여오는 일 등 난관이 많았다. 고비마다 러시아 그림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큰 힘이 됐다. 전시를 준비하느라 피곤할 법도 하지만 김 대표는 작품을 일일이 설명하고 관객들을 맞이하기에 여념이 없다.

김 대표가 러시아에서 보낸 세월이 무려 20여년이다.

소통은 커녕 읽지도 쓰지도 말하지도 못했다. 낯선 땅 러시아. 새로운 세계에 대한 설렘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두려움과 막연한 불안이 밀려왔다. 마치 깜깜한 동굴속에서 보내는 듯한 어느 날, 한 줄기 빛을 만났다. 모스크바 트레챠코프 미술관의 한 그림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니콜라이 야르센코의 그림 ‘삶은 어디에나’. 유형길에 오른 혁명가 가족이 한 줄기 햇살을 즐기며 행복해 하는 모습이 가슴을 때렸다. 절망속에서도 행복을 찾는 가족들. 순간 삶의 에너지가 솟았다. 그림은 그렇게 다가왔다.

러시아 그림에 빠져 20여년을 보낸 김 대표. 어느덧 그림은 인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김 대표는 전시 기획자, 큐레이터, 아트딜러이면서 인기 작가이기도 하다. 2017년 ‘소곤소곤 러시아 그림이야기’(씨네스트)를 출간했고 2019년 개정판 ‘미술관보다 풍부한 러시아 그림이야기’(자유문고)를 냈다. 국립중앙도서관 추천 도서에 선정되는 등 많은 관심을 받았다. 20여년간 트레챠코프·에르미따쥬 등 러시아 유명 미술관들을 수백 번 들락거리며 키운 그림에 대한 안목이 녹아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인사하는 미하일 쿠가츠의 '초롱꽃'. 2011년 70x50cm 카드보드에 유채. 이미지=갤러리 까르찌나
3층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인사 건네는 미하일 쿠가츠의 '초롱꽃'. 2011년 70x50cm 카드보드에 유채. 이미지=갤러리 까르찌나

사실 국내에서는 러시아 그림이 생소하다. 쉽게 접할 수 없다보니 그럴 수 밖에 없다.

김 대표는 “러시아 풍경화는 러시아 문학이나 음악처럼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고 강조한다. 이번 전시회는 마치 러시아 자연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하다. 바람이 우는 표정, 들꽃 내음, 구름이 떼창하는 소리까지 들린다. 특히 작품을 작가별로 전시해 작가 특유의 화풍이나 철학 등 러시아 풍경화의 다양한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다.

이번 전시의 대표작인 ‘먼 길’을 그린 미하일 쿠가츠. 현존하는 러시아 리얼리즘 풍경화의 최고 핵심이며 산 증인이다. 쿠가츠는 풍경화 뿐 아니라 정물과 초상과 풍속화 분야에서도 두각을 보인다. 일상의 특징을 명료하고 은유적으로 표현한 장르화 형성에 큰 업적을 남기고 있다. 그의 풍속화는 대부분 러시아 국립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이번 전시에서 쿠카츠의 다양한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은은한 색채의 표현과 주제의 조화가 뛰어난 작품들. 기승전결이 잘 짜인 한 편의 시를 읽는 것 같다. ‘봄 길’은 인생의 굴곡을 지나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는 스토리를 담았다. 블랙홀 같은 ‘4월 모닥불 옆에서’. 추운 날씨이지만 흰 눈 속의 따뜻한 겨울을 자신만의 색채로 이끌어냈다.

블라디미르 텔레긴의 '백야', 1996~1999. 91x100cm, 캔버스에 유채. 이미지=캘러리 까르찌나

러시아 풍경화의 음유시인으로 불리는 블라디미르 텔레긴의 ‘백야’.

정겹고 소박한 풍경이다. 마음이 평안해진다. 텔레긴은 평생을 관찰한 자연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포착해 2차원의 화폭을 채색했다. 작가의 마음속 풍경이 ‘생각’과 ‘느낌’이라는 옷을 입고 다시 현실에 나온 듯 묘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창가에서’, ‘강가의 저녁’, ‘카사리노의 봄’ 등을 바라보면 저절로 힐링이 된다. 텔레긴은 지난 2월 작고했지만 그의 작품은 큰 감동으로 남아있다.

강렬한 색채로 유혹하는 스타니슬라프 바흐발로프. 현존하는 블라디미프 화파의 최고 작가다. 넓은 전시장에서도 바흐발로프의  ‘라비나’(마가목 열매)는 한눈에 쏙 들어온다. 표현주의의 대가인 이고르 베르디쉐프 ‘타오르는 저녁’은 맑고 순수한 동심의 세계로 빠져들게 한다. 러시아 자연과 삶의 모습에 순색을 입힌 독특한 화풍을 자랑한다.

스타니슬라프 바흐발로프의 '라비나(마가목 열매)', 2009년 85x90cm 캔버스에 유채. 이미지=갤러리 까르찌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러시아 여행을 다녀온 듯하다.

김 대표가 한국에서 전시회를 열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그는 “톨스토이, 차이코프스키 등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은 유명하지만 러시아 그림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게 안타까웠다”며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러시아 문학이나 음악, 공연처럼 러시아 그림의 매력을 널리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코로나19로 지친 국민들이 러시아 자연주의 그림을 감상하며 잠시라도 힐링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내비쳤다.

김 대표는 ‘특허’ 같은 비장의 무기를 지녔다. 그림에 푹 빠져 공부하면 할 수록 작가들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먼 길을 마다 않고 작가들을 찾아다니며 소통하고 그림에 대해 토론하다보니 자연히 친분이 쌓였다. 러시아 작가 50여명과 전속계약을 맺을 정도다. 러시아 국립 미술 아카데미와는 협업 계약을 체결했다.

강정화 부관장이 러시아 들판 분위기를 살린 그림 앞에서
강정하 부관장이 이고르 베르디쉐프 작품 '다리가 있는 풍경'(2006년 80.2x99.7cm 캔버스에 유채)을 설명하고 있다. 작품 아래는 라마쉬까(소국) 등을 장식해 러시아 들판 분위기를 연출했다. 사진=최희주 기자

전시장 곳곳에는 여느 전시회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가 물씬하다. 자연주의 전시 컨셉트에 맞춰 러시아의 봄·여름이 떠오르는 들판 풍경을 살렸다.

강정하 부관장은 “러시아 자연주의 작품을 소개하는 만큼 독특한 풍경을 최대한 살리려고 했다”며 “라마쉬까(소국) 등 색색의 꽃들을 직접 손질해 러시아 들판이 연상될 수 있도록 꾸몄다”고 말했다. 전시된 작품 아래 장식된 소박한 꽃들 덕분에 마치 정원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것 같다.

러시아에서 유학한 강 부관장 또한 러시아 그림에 조예가 깊어 작품 설명에 막힘이 없다. 이번 전시회는 러시아 그림 전문 도슨트가 직접 작품을 설명해주기 때문에 그림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갤러리 까르찌나 김희은 대표는 “앞으로 다양한 주제의 러시아 그림을 계속 선보이겠다”며 “그림뿐 아니라 문학 음악 등 모든 장르를 담을 수 있는 러시아 문화 전문 갤러리를 만들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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