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소(上疏)는 신하가 임금에게 글로서 자신의 뜻을 전하는 제도다. 소(疏)에는 ‘통하게 하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이 말이 문체의 이름으로 쓰인 것은 한(漢) 나라 때부터다. 한나라 이전에도 임금에게 올리는 글은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간관(諫官) 등이 주로 임금에게 정사를 간하기 위해 올리던 글을 상소라 했다.

소의 내용은 특정 분야에 국한돼 있지는 않다. 정치 문제에 대한 비판이나 대안 제시, 벼슬을 사양하는 내용이 압도적으로 많다.

상소와 직언을 통해 개혁에 앞장섰던 율곡 이이는 성학집요(聖學輯要)에서 식시무(識時務)를 강조했다. 시무(時務)는 그 시대에 가장 시급하게 다루어야 할 일을 말한다. 급한 일이 무엇인지 알라는 뜻이다.

시무이십팔조(時務二十八條)는 고려 초기 유학자이자 중견 관료이던 최승로가 성종에게 올린 상소문이다.  성종은 중앙관 5품 이상은 모두 봉사(封事)를 올려 현재 정치의 옳고 그름에 대해 논하게 했다.

최승로는 시무 28조를 통해 왕실의 지나친 숭불 정책으로 인한 사치와 낭비 등의 폐단을 비판하고 안정된 사회 질서를 만들기 위한 사회 제도와 실리 위주의 대외 정책 등을 제시했다.

시무 28조는 성종이 수용해 고려 전기 사회를 정비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39세의 평범한 가장이라고 밝힌 진인(塵人) 조은산의 상소문 ‘시무 7조’가 우리 사회를 뒤흔들고 있다.

‘시무 7조’에 대한 림태주 시인의 반박을 조은산이 재반박한 설전은 이 시대에 보기 어려운 풍류를 맛보게 했다.

조은산의 ‘시무 7조’에 대한 비판은 자유다. 그러나 그의 삶을 폄훼해서는 안된다. 가난을 조롱하고 정직을 비웃어서는 안될 것이다.

가난하고 고단한 삶 어느 곳에도 나타나지 않았던 목동에 대한 분노가 진심을 다해 양떼를 부르는 목동의 피리소리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운 사회가 되기 바라는 조은산의 역설적인 외침이 처연하다.

“순수했던 가난이 자랑스러워 힘껏 소리 높여 고한다. 비켜라, 강건한 양에게 목동 따위는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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