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호 한국공감소통연구소 대표

우리 인생에서 가장 큰 보편적 사건 2가지를 말하라면 태어남과 죽음이다. 그런데 태어남은 이미 지나간 일이고 죽음은 반드시 맞이할 일이다. 태어남에서 죽음으로 가는 과정이 삶이다. 그런데도 삶이 두려운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죽게 될까 봐 두려운 것 아닌가?

그렇다면 죽음이 두려운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죽음을 삶과는 전혀 다른 특별한 것이라고 여겨서 더 공포스럽다. 죽는 순간에 봉착할 미지의 고통이 두렵고, 죽음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다. 선배 경험담을 들을 수 없는 죽음이기에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처럼 낯설어서 더 그렇다. 어떤 이는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하고, 어떤 이는 계속된다고 하고~. 끝나도 허무하고, 계속되어도 어떤 일이 나에게 펼쳐질지 모르기에 두렵다. 유물론자의 주장처럼 죽음과 동시에 모든 게 끝나버린다면 차라리 좋을 텐데 그렇게 된다는 것도 증명된 바가 없다. 그래서 그것도 하나의 가설일 뿐이다. 마치 종교와 신앙이 주장과 믿음과 신념인 것처럼 말이다.

삶은 불확실하고 죽음은 확실하다. 삶은 보장되지 않지만 죽음은 원치 않아도 반드시 온다. 언젠가 끝이 있는 삶의 종착역이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불확실한 삶은 익숙한데 비해 확실한 죽음은 낯설다. 죽음에 대해서 명상하는 것은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인 동시에 죽음에 대한 낯 설음에서 익숙함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이해야말로 삶이 진실되게 살아나도록 하는 촉매가 되기도 한다. 그러길래 성경에서도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전7:12)”고 하지 않던가?

삶보다 죽음이 더 공포스러운 것은 삶과는 전혀 다른 특별한 경험이라 여겨서 그렇다. 죽음은 삶처럼 배운 바가 없다. 국어 영어 수학이 삶을 배우는 것이라면 죽음은 무엇으로 배우는가? 삶과 죽음이 한 몸인데, 국가에서도 죽음에 대해서는 종교 영역에만 맡겨 둔다. 어떤 면에서 보면 무책임한 것 같기도 하다. 참으로 중차대한 기능이 종교에 있지만, 보편성을 잃어 기울어진 신앙도 종교라는 이름 아래서는 검증 없이 보호되기 때문이다.

일상의 삶이 특별한 경험이 아니라면, 죽음 역시 특별한 경험이 아니라는 것이 논리상 맞지 않겠는가?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검증 안된 임사체험(臨死體驗) 이야기를 굳이 꺼낼 필요도 없이 우리는 밤마다 잠을 자고 꿈을 꾸는 경험을 한다. 이것이 죽음에 대한 연습이고 예고편 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삶이나 죽음이나 동일한 반열의 경험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죽음도 삶과 똑같은 경험이라면 죽음을 지나치게 두려워해야만 할 필요가 있겠는가? 좋은 꿈을 꾸면 아침이 상쾌하듯 바른 삶을 살면 죽음이 가볍지 않겠는가?

죽음에 대한 명상은 그것에 대한 신비함에 머물지 않고 일상처럼 익숙하게 만들어 삶이 더 건강하도록 하는 순기능으로 가야 한다. 반대로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망상이라면 잘못된 처방약이다. 그것은 효능보다 부작용(Side Effects)이 더 큰 약과 같다. 전염병에 대한 백신이 단기간에 상용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원하는 효능보다 원치 않는 부작용이 더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인 것과 같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도 신비주의에 빠지는 부작용을 거부해야 한다고 볼 것이다. 엄밀히 종교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자기암시이고 주장이고 믿음이며 고백이다. 그러기에 그 분야에서의 주장이나 믿음은 틀리게 보여도 약이 없다. 틀리다는 반대 근거를 제시하기 어려워 그 역시 주장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혹 사기성 주장이나 혹세무민하는 사이비 종교도 단죄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신앙만큼은 당사자 개인이 무한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개인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인류 역사의 교훈이다. 모든 종교의 경전은 하루아침에 한 사람 손에 의해 기록되지 않았고, 그 경전에 대한 해석도 고정불변하지 않았다. 그러길래 종교 역사는 경전 해석의 변천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삶은 죽음을 향해 떠나는 미지의 여행이요, 죽음은 이 땅에서 끝없는 고난을 종식시키는 조물주의 사랑임을 믿는다. 생명을 있게 한 영혼의 부모, 하늘을 믿기 때문이다. 만약 이 땅에서 죄와 더불어 죽지 않고 지금 이대로 계속 산다고 한다면 세상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영원토록 사용할 돈과 권력을 잡고 지키기 위해 생지옥이 되지 않겠는가?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면 외면하지 말고 인정하며 익숙해지자. 죽음과 한 덩어리인 삶의 묘미를 즐기자. 그리고 죽음 앞에서 사소하지 않은 일이 없음을 인식한다면, 생명을 좀먹는 원한을 품지 말고 풀어내 버리자. 사소한 일에 목숨 걸 만큼 우리 생명이 하찮은 것은 절대로 아니지 않은가? 지금 이 시간에도 죽음의 때는 가까워지고 있다. 이 땅에 살아있는 어느 누구라도 예외 없이~

▲윤영호

한국공감소통연구소 대표

‘마음감옥에서 탈출하는 열쇠꾸러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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