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이 가장 분명한 실체인 것처럼 느껴왔고, 우리 눈에 크고 중량감 있는 것일수록 힘센 존재로 여겨왔다. 그러나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인간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적의 군사력보다 더 두려운 것이라는 것을 지금 우리는 생생하게 체험하고 있다. 보이지 않기에 동선(動線)을 파악하기 어렵고, 동선을 알 수 없기에 가시적으로 대처하기가 곤란하기 때문이다. 마치 밝은 대낮의 예측 가능한 전면전(全面戰)보다 캄캄한 밤중의 기습(奇襲)이 더 공포스러운 것과 마찬가지라 하겠다.

같은 논리로 바이러스를 퇴치하기 위해서, 우리의 생각이 보이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보다 추상적인 것에 도달할 수 있을 때에, 그 대처능력이 상대적으로 커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접종되고 있는 코로나19 백신도 그 바이러스가 전염되기 시작할 때, 보이는 마스크만 사려고 줄 섰던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의 유전자 ‘염기서열’에까지 초점을 맞추며 상상했던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바로 그 증거다.

실체가 없어 보이는 것이 더 크게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예전에는 잘 알 수 없었지만 과학이 발전할수록, 문화가 진화할수록, 혹은 경천동지(驚天動地) 할 팬데믹이 나타나는 경우, 우리는 보이는 세계보다 보이지 않는 세상이 더 광대하고 그 영향력이 크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직면할 수 있는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고정적 실체의 비현실성과, 실체가 없어 보이는 것들의 현실적인 영향력에 대해서 통찰의 현미경으로 들여도 보고자 한다.

우선, 작년 초 세계 10대 자산기업 현황을 보면 ①애플, ②마이크로소프트, ③구글, ④아마존, ⑤페이스북, ⑥알리바바, ⑦버크셔해서웨이, ⑧텐센트, ⑨JP모건, ⑩존슨엔존슨이다. 이중에서 ⑦⑨⑩위 3개사를 제외한 기업이 모두, 우리가 전통적으로 생각했던 고유의 자기상품이 없는 기업이다. 보이는 하드웨어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소프트웨어 회사다. 보통 사람이 생각하기에 그 회사가 뭐 만드는 회사인지 잘 모르는 기업인 것이다. 자기 고유의 브랜드가 아니라 남의 상품과 남의 콘텐츠가 활동할 수 있도록 판과 통로를 만들어준 기업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기 실체가 없어 보이는 이들 회사의 시가총액이 전 세계 기업의 시가총액을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가공할 만한 영향력이 예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분명한 현실이 된 것이다. 우리 가까이 있는 최근 실례를 하나 더 알고 싶다면, ‘카카오 뱅크’를 보라. 점포도 없고 사무실도 없는 사이버기업이지만 그 실적은 기존 은행의 성장속도를 훨씬 더 능가한다.

우리의 시선이 고정된 실체 관념에만 집중되어 있으면, 이렇게 실체가 없어 보이는 듯한 영역에서의 어마어마한 영향력에 대해서 소경이 될 뿐만 아니라, 보이는 부분만 보기 때문에, 자아와 타자가 완벽하게 대립적인 존재로만 의식한 나머지 나와 남을 철저하게 구분하는 이기심에 함몰되기 쉽고,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불변의 조건을 끝까지 고수하려는 고집으로 인해 괴리된 현실을 고통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다. 변화할 수밖에 없는 세상의 이치와 정면으로 역행하기 때문이다. 지구가 돌면 그 안에 존재하는 나도 함께 좌표가 이동된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세상 모든 것은 공간 위치와 형태가 시간의 흐름속에서 변화한다” 는 사실만이 “변하지 않는 진리” 라 할 것이다.

우리가 불변의 독립적이고 고정된 실체라고 말하고 있는 피조세계의 모든 것들도 엄밀히 말한다면 관념의 결합체다. 예컨대 우리가 한강이라고 말할 때, 그 한강에 차 있는 물은 고정불변이 아니다. 지금 흐르고 있는 한강물은 어제의 그 물이 아니다. 물이 흘러가는 통로(프레임)만 유지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말하는 한강이라는 개념 속에는 물을 포함하여 상상한다. 더 나아가서 물이 흐르는 그 통로 자체 마저도 엄밀히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현상인데 그것을 고정된 명사처럼 부르고 있다. 그것은 유동적인 흐름(flow)의 현상을 마치 정지된 재고(stock)처럼 형상화하여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제 딱딱하게 경직되었던 우리의 사고체계를 유연하게 운영해야 할 때가 되었다. 보이는 세계에 필적하는 사이버 세상의 영향력을 주저하지 말고 인정해야 한다. 실체는 없어도 그 작용은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과거처럼 종이에 인쇄된 책과 신문만 정보와 지식의 매개물이 아닌 것이다. 예컨대, 우리가 사용하는 핸드폰도 옛날처럼 그냥 단순한 전화통이 아니다. 손에 들고 다니는 컴퓨터를 넘어서 이제는 세상의 흐름을 담아내는 인공지능의 통로다. 보이는 용기, 즉 하드웨어 보다 그 속에서 작동하는 소프트웨어의 효용이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생각의 유연함을 우리의 삶 전체로 확대해서 적용해보자.

삶의 과정속 에서, 도저히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의 실체(實體)라고 우리가 느끼고 있는 것들도 일정 조건에 따라 변화되어 형성된 관계의 결합체라면, 그 문제마저도 결국 변화될 수밖에 없는 것임을 인지할 수 있어야 하겠다. 그때 에야 비로소 우리 불행의 주범이 되는 갈등의 원인과 그것을 푸는 실마리를 더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러한 인식의 각도 변화가, 직면하는 문제 핵심에 보다 솔직하게 다가가는 유력한 처방이 될 것이 분명하다. 화석화된 불변의 스펙이나 편견에 묶여 있지 말자. 감정의 노예가 되어버린 ‘똥 고집’을 우수마발(牛溲馬勃)처럼 떨쳐버리자. ‘너 죽고 나 죽고’ 식, 오기가 세상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돌멩이처럼 굳어버렸던 우리의 안목을 보다 유연하게 하여 보는 눈을 넓히는 것이 세상을 살리는 상생(相生)의 세계관이다.

실력과 진정성과 열린 세계관을 십분 발휘하면서 끊임없이 밀려오는 불확실성의 세상 파고를 서핑(surfing) 하듯 즐기며 헤쳐 나가자.

▲윤영호

한국공감소통연구소 대표

‘마음감옥에서 탈출하는 열쇠꾸러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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