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정치와는 전혀 무관한 개인 간의 문제라는 점을 미리 밝혀 둡니다.

세상은 진화하는데 아직도 헛소문 뒷담화의 구태는 변하지 않고 있다.

헛소문이란 근거 없이 떠도는 가짜소식으로서 대개 험담이다. 문제는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소문 자체가 대중의 강력한 미디어로서 세상에 작용하는 파괴력이 크다는 점이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자주 사실이 확인되지 않은 소문을 퍼뜨리며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소문을 쉽게 믿어버리는가?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헛소문의 피해로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억울함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으로 목숨까지 끊어버린 뉴스를 우리가 종종 접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증거다.

소문은 연쇄성과 확장성이 있어서 열 사람 입만 거치면 세상에 인식되는 진실은 10%미만으로 줄어든다는 극단적인 말이 있다. 또 세 사람만 똑같이 우겨 대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낸다는 속담도 있다. 즉 근거 없는 말도 여럿이 하면 곧이듣게 된다는 뜻의 ‘삼인성호(三人成虎)’가 바로 그 말이다.
“우리가 상대방의 등 뒤에서 쑥덕대는 말을 그의 면전에 대고 직접 한다면 이 사회는 도저히 유지되질 못할 것이다.“(오노레 드 발자크)

그럼 도대체 이런 험담과 헛소문은 누가 만들어내며 왜 그런 짓을 하는 것일까?

우선 개인 간에 헛소문을 제조하는 사람들은 이런 유형이다. 그들은 실력은 없지만 주인공이 되고 싶고, 권위를 가지고 싶고, 세력을 이루고 싶은 기형적 욕구를 즐기는 사람들이다. 그 심리를 더 들여다보면 자기보다 능력 있는 사람에 대한 열등감과 시기심, 또는 ‘라이벌 의식’에서 출발했다. 자신의 능력과 성품을 보고 주변 사람들이 몰려들면 좋겠지만 그것에 못 미치는 사람이, 손쉽게 이룰 수 있는 정보 세력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잔머리를 굴려 악의적인 이미지를 어떤 대상에 덧씌우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시기심과 열등감 때문에 고통스러운 마음이 타인을 험담하고 악의적인 소문을 내면서 상대적으로 내 가치가 올라간 것처럼 잠시 자기최면에 빠진다는 것이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의 알려진 특징은 일반적으로 칭찬에 인색하고 무엇이든 은근히 헐뜯는다는 심리적 통계가 있고,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상대와 친분관계에 금이 간 제3의 인물이 생기면 그 틈을 잽싸게 파고들어가 자기 패거리로 끌어들이는 잔꾀에 능하다는 것이다. 전쟁할 때 속임수를 써서라도 이겨야 하는, 이른바 손자병법 중에서 ‘적(敵)의 적(敵)은 곧 나의 동지’라는 전략을 쓰는 것이다. 개인적인 감정을 국가 간의 전쟁만큼이나 크게 여기는 지나친 집착 때문에 지고는 못 살고, 조금이라도 손해 보고는 못 견디는 속 좁은 소견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사고방식이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세상에 대해서는 너무 많이 아는데 진정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모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어느 철학자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가장 먼 존재”라고까지 했겠는가?

그렇다면, 이들에게 귀를 내어주고 맞장구를 쳐주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우선 사실에 대한 판단 능력이 떨어져 쉽게 부화뇌동(附和雷同) 하는 경망(輕妄)스러운 사람들이고, 그다음은 세력을 가진 자에게 거슬리면 배척당하는 게 두려워서 “사실 확인해 봤느냐?” “진짜 사실이냐?” 물어보는 것조차 못하는 나약한 유형이다. 또한 옳지 않은 줄 알면서도 잠시 눈을 감고 헛소문의 동조자가 되어 정의보다 사욕을 챙기는 무책임한 유형이다.

우리는 이처럼 헛소문을 만들고 각색하는 자와, 그에 동조하는 자의 말을 들을 때에 그들의 말속에 숨은 의도, 즉 행간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같은 수준의 사람으로 추락되지 않고, 한쪽 말만 듣고 판단하는 ‘바보’가 되지 않으며, ‘공범’이 되는 것도 면할 수 있다.

만약, 내가 헛소문의 직접 피해 당사가 되었을 때는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현명할까?

가해자의 이런 행동이 치졸한 인격의 소인배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알면 상대를 크게 인식할 필요가 없다. 닭 잡으려고 소 잡는 칼을 쓸 필요가 없다. 과잉 대응하지 말고 차분해질 때, 고통 화근의 증폭을 막을 수 있다. 당장 복수하거나 똑같이 대응해 줄 확실한 반대 증거가 있다 할지라도 “빚 지고 사는 것보다 빚 주고 사는 것이 낫다”는 인식 속에서 정신적 고지에 위치하는 것이 유리하다. 고지에서 저지로의 공격은 필요할 때면 언제라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필자가 얼마 전에 겪었던 최악의 억울하고 황당한 피해 경험(지금은 용서와 무신경으로 인내하고 있지만)에서 깨달은 것이다.

헛소문-뒷담화는 간접 살인행위다.

그것이 세상과 자기 자신에게 미치는 해악이 얼마나 크길래, 유력한 종교마다 그 경전에 공통의 핵심 죄목으로 기록되어, 오고 오는 전 인류에게 가르치고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바로, 그로 인해 되돌려 받을 과보가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핵심 계명 “십계명”에도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고 하고, 불경의 5가지 핵심 계율 “오계”에도 “불망언(不妄言)”, 즉 ‘삿된 말을 하지 말라’고 한다. 거짓말, 이간질 같은 ‘삿된 말’로 짓는 악업의 과보가 심히 크다는 것이다.

이 종교에서 “인과응보(因果應報)”라고 하는 것이나. 저 종교에서 “심은 대로 거둔다”고 하는 것이나, 결국 다르게 표현된 같은 논리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편, 이 악행은 우리의 실정법에도 ‘명예훼손죄’ ‘모욕죄’라는 죄목으로 그 처벌을 분명히 하고 있다.

현실에서 들키지 않는다고 해서 악행의 죄과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전 인류가 인정하는 대부분의 경전들 속에 동일하게 기록된 이 계율이 헛말이 아니라면, 자신이 뿌린 악(惡)한 씨앗의 열매를 자기 자신 말고 그 누가 거두게 되겠는가? 그 날에~

불확실한 근거로 타자(他者)를 악마로 만든 그것이 결국 자신(自身)을 악마로 만들 확실한 근거가 된다는 사실 앞에 그 누가 놀라지 않겠는가? 그 날에~

“험담은 세 사람을 죽인다. 말하는 자, 험담의 대상자, 듣는 자.” (미드라쉬)

☞아무것이나 물어뜯는 좀비가 되지 맙시다.

☞헛소문의 파괴력이 클수록 더 큰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타인에게 “염장 질” 하는 습관의 업장에서 해탈합시다.

☞악한 일을 하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른다면 그것이 사이코패스이며 가해를 하면서도 느낌이 없다면 양심에 화인 맞은 그 영혼은 이미 환자일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남은 삶이 결코 길지 않음을 기억합시다.

▲윤영호

한국공감소통연구소 대표

‘마음감옥에서 탈출하는 열쇠꾸러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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