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삶의 궤적은 매 순간 선택의 연속이다. 그런데 그 선택은 과연 절대적으로 내 주체적인 의지만으로 결정되어지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나나 너나 할 것 없이 그 시절 그 상황에서, 그렇게 선택하고 그렇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선천적으로 또는 살아가면서 각자에게 ‘형성된 경향성’에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순수한 자아와 순수한 자유 의지를 칼로 무찌르듯, 따로 떼어내어 구분 지어 바라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길래 ‘자유 의지’라는 말은 신이 가르쳐준 용어가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단어라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모든 생명체는 누구나 자기 안전과 자기 행복을 본능적으로 추구하지만,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어떤 사람은 동쪽을 향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그와 반대 뱡향인 서쪽을 선택하기도 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선택(選擇)과 호 불호(好不好)를 결정하는 발판, 즉 ‘형성된 각자의 경향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길래 달콤한 행복을 꿈꾸며 결혼 상대자를 선택했지만 숨겨졌던 각자의 경향성이 강하게 충돌하면서 추구했던 것과 반대 방향인 파국을 맞기도 하고, 성공한 CEO가 되기 위해 창업을 했지만 폐업의 쓰라린 경험을 하기도 한다. 선택 기준이 객관적이지도 못하고 독립적이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경향성’이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생물학적 조건인 유전자, 즉 성별, 혈액형, 기질 등과 자신이 속한 사회적 조건인 문화, 가치관, 세계관, 생태환경 등에 영향을 받아서 발현되고 반응하는 것으로, 첨단 물리학 양자역학의 이론으로 설명하자면, 에너지 파동의 모양과 강도와 색깔의 빈도가 쌓이고 쌓여져서 마치 타고난 개성처럼 작용함으로써 나와 내 주위에 영향을 미치는 ‘방향성 있는 흐름’인 것이다.

그러길래 우리는 종종 감정의 흐름에 함몰되어서, 의도하는 목적이나 선한 자기 의지와 관계없이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순간적으로 내뱉기도 하고, 돌출 행동을 하여 두고두고 후회하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면 “내 마음 나도 몰라~!”를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선택이 전적으로 자기 의지대로 독립적이지 못한 대표적 현상이다. 자신에게 손해 볼 방향으로 선택하고 나아가는 자기 의지는 원천적으로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만물의 영장으로서 중요한 교훈과 지혜를 깨달아야 할 당위성을 발견할 수 있다. 행복을 원하되 불행한 방향으로, 또는 안전을 원하되 위험한 방향으로 엉뚱하게 질주하는 원인과 현상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우리 선택에 궤도 수정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훈과 지혜를 깨닫는 단초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메타인지(metacognition)’를 적극 활용하는 것이다. 메타인지 또는 초인지(超認知)라는 것은 자신의 인지 과정에 대하여 한 차원 높은 시각에서 관찰ㆍ발견ㆍ통제하는 정신 작용을 말한다.

실례로 격한 감정에 휩싸여 물불을 못 가리는 상황에서, 지금 타오르는 감정은 나 자신과 동일체가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여, 감정의 흐름과 나 자신과의 거리를 떼어놓는 것이다. 마치 제3자의 입장에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나와 내 감정과 내 환경을, 해석 없이 남의 일처럼 그냥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안목과 행동능력이 습관처럼 체득될 수만 있다면, 자기에게 손해를 입히는 감정의 노예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타오르던 감정은 거품과 같아서 내가 원치 않아도 시간이 지나고 조건이 변하면 사라지는 것이니, 제 스스로 사라지는 감정 덩어리에 묻은 상처는 마치 옷에 묻은 때와 같은 것인 바, 내 몸의 상처만큼 아픔을 곱씹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해보는 또 다른 감정의 불씨를 확대 재생산하지 않을 수 있는 지혜가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깨달음 속에서 메타인지가 지속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면 ‘잘못된 자기 경향성’ 은 바람직한 방향으로 점차 수정될 수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형성된 것은 근본적으로 소멸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자신의 인지과정을 그렇게 메타인지하듯, 상대방의 감정적 반응도 그렇게 바라본다면, 비 이성적이고 파괴적인 행동을 하는 타인을 볼 때, 이전에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그 악마(?)를 향해서도,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도록 조건의 노예가 되어버린 그에 대해 측은한 마음을 어느 정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단단히 묶였던 원한과 복수의 상속 고리를 점차 끊어낼 수 있는 실마리를 발견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더 나아가서 자신의 경향성과 상대의 경향성이 너무 강해서, 지금 이 시점에서는 도저히 합석(合席)할 수 없는 상황임이 판단된다면, 즉 흔히 말하듯이 두터운 업장때문에 충돌할 수밖에 없다면, 당장 해결하려고 무모한 시도를 하는 것보다는 시간을 벌기 위해 일정 거리를 유지하는 현명한 처방을 도출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종교 차원을 떠나서 행복을 복원하기 위한 깨침과 지혜를 얻는 수행은, 자신과 세상의 평화를 위해 보물과도 같은 가치다. 그것은 ‘인과응보’라는 법칙을 넘어서는 ‘초인과의 발상’이기 때문이다.

신앙심이 아무리 깊다고 해도 인간은 인간이다. 탐욕과 감정의 노예가 되어, 순수한 자기 의지 혹은 하늘의 의지를, 조건으로부터 쌓여진 감정흐름의 경향성과 혼동하는 순간, 평상시에 익혔던 진리는 어느새 망각되고, 동물적 감정의 도가니 속에서 헤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필자가 예전에 언급했던 말이 문득 떠오른다.

“항아리 속에서는 진정한 항아리 모습을 알 수 없다”

▲윤영호

한국공감소통연구소 대표

‘마음감옥에서 탈출하는 열쇠꾸러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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