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호 칼럼] 우리 몸의 중심은 어디입니까?
[윤영호 칼럼] 우리 몸의 중심은 어디입니까?
  • 윤영호
  • 승인 2021.05.31 14: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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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도 아니고, 심장도 아니고, 다리 근육도 아니고, 바로 우리 몸의 중심은 가장 아픈 곳이다. 즐거움은 흩어지고 이완되는 기운인데 반해, 괴로움과 통증은 모이고 집중되는 기운이기 때문이다. 얼굴이 아름다워도, 공부를 잘해도, 키가 커도, 모두 다 아프지 않을 때 일이다. 우리 생존 메커니즘은 아픈 곳에 온 신경이 집중되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곳부터 해결하라는 생존본능 센터의 신호이기 때문이다.

‘재수 없으면 100살까지 산다’고 했던 것이 얼마 전의 이야기인데 이제는 ‘재수 없으면 120살까지 산다’고 말해도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 정도로 평균 수명이 길어졌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제가 그렇게도 소망하던 ‘오래 사는 것’이 평범한 현실로 그냥 다가왔는데 과연 우리는 행복할까? 백세시대에 ‘출산율 세계 최저’, ‘노인 자살률 세계 최고’라는 아이러니한 현상을 진시황제가 바라본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아프거나 불안한 노후라면 장수한다는 것이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일 수 있다. 살기 힘들다 해도 마음대로 죽을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장 아픈 곳이 몸의 중심이듯, 노후생활의 중심은 과연 어디일까? 한마디로 노후생활의 3대 불안요소 즉, 돈, 건강, 외로움의 문제가 노후생활의 중심 과제다.

과거에는 30년 준비(공부)해서 30년 활동(직장생활)하고 10년 노후생활로 자녀에게 의지하며 살다가 생을 마쳤다. 그러길래 그 수명을 채우면 경사라 여겨 동네 환갑잔치, 칠순잔치를 했다. 백세시대인 지금은 35년 취업 준비해서 20년 직장 생활하는 것도 보장된 일이 아닌데 반해 은퇴 후 노후생활 기간은 45년으로 늘어났다.

산업혁명 이후 자본이 축적되고 인구증가로 대량생산이 필요했던 과거는 필연적으로 경제발전 고성장의 시대였다. 고성장 시대의 특징은 일자리가 늘어난다는 것이고 투자가 늘어나기 때문에 은행 이자도 높을 수밖에 없었다. 은퇴 후에도 그나마 축적된 자본수익, 즉 이자가 노후생활의 버팀목이 될 수 있었으나 그와 같은 고성장 시대는 이제 기대하기 어렵다. 이자도 거의 없는 시대이므로 돈 벌 수 없는 노년기에는 그나마 확보된 생존자금을 하나하나 빼먹고 사는 형국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미국 독일 등 선진국은 어떠한가?

그들은 이미 앞을 내다본 듯 하다. 우리나라만큼 자녀 대학 학비와 결혼자금, 심지어 집값이나 주거비용을 대주는 나라는 없다. 캥거루족도 우리보다 적다. 미성년에서 성년이 되는 고등학교 졸업 후에 자녀는 부모의 재산과 관계없이 무조건 독립해야 한다. 학비도 결혼비용도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 사이 부모는 연금으로, 세금을 통한 국가보장펀드로 노후가 준비된다. 그러기에 자녀들도 부모의 노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성년이 되면서부터 부모에 의지하지 않고, 당연히 스스로 돈을 벌어 대학을 다녀야 하기 때문에 무조건 대학 졸업장에 목을 매지 않는다. 자기 적성과 전망이 불투명하다면 대학보다 일찍부터 사회에서 돈 경험을 하면서 자기직업을 선택한다. 합리적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대학 간판과 체면문화가 지배하다 보니 남 따라 시장가듯 불투명한 전공을 막연하게 따라간다. 좋은 대학 나오면 좋은 회사에서 무조건 높은 월급을 받던 고성장 시대는 이미 끝났다. 이제 저출산으로 점차 입학지원생이 입학정원보다 적어진다. 따라서 특성 없이 경쟁력 약한 대학은 점차 유지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모든 사람이 다 대학 나와 특별하면 특별한 의미는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자녀세대도 부모세대도 현실 인식을 바로 하고 서로를 이해해 주어야 할 때가 왔다. 지금 젊은이들은 취업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로또 맞듯 정규직으로 직장에 들어가면 거기에 생명을 받치듯 올인해야 살 수 있다. 그러면서 가정을 유지해야 하니, 결혼과 출산선택이 50% 미만이라는 현실을 부모세대가 이해해 주어야 한다. 한편 자녀도 부모세대를 이해해 주어야 한다. 45년으로 늘어난 노후세대의 삶을 위한 생존자금을 인정해 주고 축내지 말아야 한다. 전쟁하듯 바쁘게 살아가느라 자녀가 자주 찾아오지 못해도 속 썩이지 않고 살아가기만 하면 효도라고 여겨야 하듯이, 부모가 자녀의 경제적인 짐거리만 되지 않아도 고맙게 여겨야 한다. 그렇지 않고 지나친 욕심으로 서로간 무리한 요구를 하다 보면 천륜이라는 혈연관계도, 그동안의 희생과 은혜는 간곳없고 한순간 정글 속 동물의 관계처럼 변하는 황당한 상황을 얼마나 많이 목격하는가 말이다. 어차피 자녀도 독립된 가족이고, 부모의 남는 재산은 자녀한테 돌아갈 텐데~

지금 우리는 코로나19로 인해 막연히 예상했던 단절된 미래를 앞당겨서 현실로 경험하고 있다. 내 수명이 노후자금보다 길다면, 자녀가 우리의 노후대책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버는 전략보다 인출전략이 더 중요하다. 체면 비용을 줄이고 조건에 맞춰서 살아야 한다. 낭비요인과 거품 요인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과감하게 결단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 문제만큼은, 사회, 문화, 종교 영역에서 조차도 예외가 있을 수 없음을 우리는 코로나 방역을 하면서 절실히 경험했다.

건강과 외로움의 문제도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세대와 관계없이 이혼, 사별, 기타 사정에 의해서 원치 않는 독거로 살아가는 인구가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다. 누구나 예비 장애인이듯, 누구나 예비 독거인이다. 얼마 전부터 영국에 외로움의 문제를 해결하는 목적으로 고독부장관제도가 생겼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특히나 가족관계가 여성 중심 편향으로 바뀐 우리나라 현실에서 자녀가 아들뿐인 부모는 더 외로울 수밖에 없는 역학구조다. 부자지간의 정이 왜 없겠냐마는 그저 안타까울 뿐, 뾰족한 수가 없지 않은가?

‘벼락부자라’는 말은 들어봤어도 ‘벼락 거지’라는 말은 최근의 용어다. ‘고독사’ ‘혼밥, ‘혼족’도 예전에는 익숙하지 않던 현상이다. 점차 보편화 되어가는 이러한 사회현실은 누구나 남의 일로만 여길 것이 아니다. 세상에 애지중지하면서 키우지 않은 자식이 어디 있단 말인가? 어느 손가락 깨물어서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어디 있단 말인가? 길어진 노후기간을 자식에게 짐 되지 않기 위해 지금 이 시간에도 전전긍긍한다. 조부모와 자녀세대 양쪽으로 희생하고 팽 당하는 낀 세대의 애환이야말로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이 시대에 등장한 또 하나 아픈 곳 중의 하나다. 아픈 곳이 그들 삶의 중심이다.

▲윤영호

한국공감소통연구소 대표

‘마음감옥에서 탈출하는 열쇠꾸러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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