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팬데믹 세상이 된 지 1년 반이 넘어가고 있다. 최근엔 ‘델타변이 바이러스’ 추가 발생으로 이 상황이 언제 끝날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현실이다. 또 어떤 형태의 변이된 바이러스가 출현할지 도무지 예측 불가능한 세상에 살고 있다. 지친 일상을 반영이라도 하 듯,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신조어에 이어서 ‘코로나 블루(blue)’라는 신조어가 익숙한 세상이 되었다.

20세기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은 인류는 전쟁의 공포를 다시 겪지 않으려고 세계 평화를 목적하는 유엔의 기능을 더욱 강화하면서 혹시나 발생할지 모르는 세계 3차 핵대전을 걱정하고 있었다. 거대한 폭발력의 핵무기나 우주행성의 지구충돌 같은 크게 보이는 재난이 그동안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공포였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려했던 경천동지할 폭음의 대재앙이 일어나기 이전에, 소리 없이 다가온 미세한 바이러스의 역습이 온 지구촌을 뒤덮은 것이다. 바이러스 중에서도 한 겹으로 된, 아주 작고 허접한 바이러스, 즉 존재 하는건지 마는건지 혼자서는 생존할 수조차 없는 반쪽자리 생명체가 이토록 세상에 공포와 무기력을 야기하고 있다는 엄연한 현실에 새삼 우리의 기존 관념과 인지 상태가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우리는 “큰 것은 강하다”는 대마불사(大馬不死) 이론을 우리의 삶의 지향점으로 삼아왔다. 너도나도 몸집을 키워 대마불사 기업, 즉 거대한 글로벌기업으로 가기 위해 대량소비를 부추길 수 밖에 없었다. 그 방법으로 인간의 끝없는 요망을 자극하여 중독에 가까운 충성고객으로 만드는 전략이 적중했다. 무분별한 대량소비를 유도하기 위해 영업광고전략은 인간 탐욕의 뇌를 자극하여 절제할 수 있는 기능을 약화시키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지구가 쓰레기로 덥히던 말든, 이산화탄소가 대기권의 구멍을 내던 말든, 우리가 지속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기본 환경이 무너지던 말든, 탐욕의 질주는 멈추지 않았다.

게다가 우리는 국가 경계와 민족 단위로 사는데 익숙해 있어서 지구촌 반대쪽에서 일어나고 있는 재난에 대해서는 무감각해 왔다는 것이 정직한 고백이다. “우리 가족만 괜찮으면~” 상관없다는 근시안적 사고에 안주해 있었기 때문이다.

해양생물학자 레이첼 카슨은 그의 저서 “침묵의 봄”에서 무분별한 맹독성 살충제 살포로 인해 봄을 알리는 종달새 소리가 사라지고 있음을 최초로 경고했다. 환경오염으로 벌들이 사라지면 인간은 4년 안에 멸망한다고 천재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말했다. 이대로 가면 100년 안에 인류의 성장은 한계에 봉착할 것이라고 세계 52개국 과학자, 경영인, 전직 대통령 등으로 구성된 로마클럽에서 세상에 보고했다.

마침내 전쟁 방지에 주력했던 유엔이 이 점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세계 환경개발위원회는, 번영된 삶이 우리 세대에 끝나지 않고 후손에게 이어지기 위해서는, 무분별한 팽창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발전을 도모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대로 가다 가는 끝난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2015년 제70차 유엔총회에서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17개 목표와 169개 세부 목표를 제시했다. 이것이 우리가 심각한 환경파괴와 기후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마지막 세대라는 절박한 상황인식의 발로였던 것이다.

이제, 코로나19 바이러스 대재앙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기존에 갖고 있던 안목 체계를 수정해야만 하는 시점에 이르게 되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즉, 큰 것과 작은 것이 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부분과 전체가 따로 작용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작은 것은 큰 것에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지 큰 것의 일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모든 존재가 연결되어 있어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이다. 이런 내용들은 동양철학의 근간인 동시에 유력한 세상 종교들의 뒷배경이었음에도 우리가 보는 눈이 없었다. 선지자 같은 사람들의 애타는 경고 소리에도 듣는 귀가 없었다.

코로나19 재난을 경험하면서 지난번 칼럼에서는 “욕망의 방향을 바꾸라” 는 메시지를 전했고 이어서 이번에는 “탐욕과 거리두기”메시지를 전하고 져 한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끝내기 위해서 세상 환경과 나 자신을 망치는 원흉, 즉 “탐욕”에서 거리두기를 하지 못한다면 어떤 처방도 재발되는 지구촌 재난을 원천적으로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교훈을 얻지 못하는 고난과 재난은 무의미하다. 인류가 그동안 생존하며 발전하게 한 공신은 고난과 재난,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터득한 배움, 즉 “교훈”이라는 소중한 가치였기 때문이다. 이제서야 겨우 “탄소 중립”이니 “환경보존”이니 하는 말들이 어슴푸레하게라도 보이고 들리기 시작했다는 것은 코로나19 재난을 통해서 얻어진 소중한 배움이라고 평가한다.

우리의 작은 일상이 세상의 건강이다. 내 집 앞을 청소하는 일은 곧 지구의 일부를 깨끗이 하는 것이요, 내 안의 끝없는 “탐욕과 거리두기”를 하는 것은 세상을 지속 가능하게 지켜내는 파수꾼인 동시에 “사회적거리두기”를 종식시키는 첫걸음이라고 감히 주장한다.

▲윤영호

한국공감소통연구소 대표

‘마음감옥에서 탈출하는 열쇠꾸러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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