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호
윤영호 한국공감소통연구소 대표

선거때만 되면, 예외 없이 거두절미하고 퍼뜨리는 흑색선전이 난무한다. 민주주의를 시작한 지도 꽤 되었고 경험도 어느 정도 쌓여 이제는 좀 더 성숙해질 때도 되었건만 아직도 요원한듯싶다. 아니 오히려 거꾸로 퇴보하는 느낌마저 든다. 단세포적인 마타도어를 바라보는 자체만으로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은 육체의 결함일까? 사회의 병리일까?

앞뒤 전후 사정 이야기를 싹둑 잘라버리는 것을 거두절미(去頭截尾)라고 한다. 진실과 관계없는 사족(蛇足)을 줄인다면 긍정적일 수 있지만, 앞뒤 상황을 무조건 잘라 버리고 단어 몇 개로 구성된 단문만을 의도적으로 강조하므로 인해, 본말이 전도되거나 엉뚱한 이미지 혹은 반대 의미로 오해된다면, 거두절미한다는 것은 심각한 가해행위다. 설상가상으로 거기에 의도된 해석을 붙이거나 색깔을 입혀 오해를 조장하거나 이미지를 덧씌운다면 이는 심각한 범죄행위가 아닐 수 없다. 본래 의도나 팩트와 전혀 다른 이야기로 헛소문을 퍼뜨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 교회 경험이다. 구원받게 하는 것은 믿음이냐? 행위냐? 하는 것을 가지고 대립하여 토론을 했었다. 진영논리로 자기주장에 도움 되는 성구만 찾아 배경 삼아 주장을 위한 주장을 했다. 이것은 바른 진리를 찾고자 함보다는 다분히 주장을 위한 주장이었고, 진영 대결을 위한 연습이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믿음을 강조하는 곳도 있고 행위를 강조하는 곳도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이것뿐이겠는가? 술(포도주)의 유익함과 해악이 같은 경전 안에 있고, 부와 소유가 축복의 상징처럼 묘사되는 부분과, 반대로 청빈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부분도 분명히 있다. 차던지 뜨겁던지 분명히 하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좌로나 우로나 치우지지 말라는 이야기도 있다.

문제는 어떤 상황, 어느 곳에서, 어떤 목적으로 그런 이야기를 했느냐 하는 배경을 함께 이해하지 않으면 오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거두절미의 병폐다. 특정 구절만 묻지마 식으로 고집하면 이해관계에 따라 교파가 나눠지고 심하면 사이비 교주가 생긴다. 그곳에서 가장 돌이킬 수 없는 피해자가 생각 없이 추종하며 세뇌 당한 순진한 교인들이다.

우리의 현실 생활에 적용되는 법률도 그 법률이 만들어지게 된 선한 목적, 또는 해악을 줄이기 위한 목적이 반드시 있다. 그것이 이른바 가장 중요한 입법 취지요 법의 배경이다. 그러기에 법률조항은 시대에 따라 바뀔 수 있어도 사회의 안정과 인간의 존엄을 위한 입법 취지는 바뀌지 않는다.

어느 주인이 하인에게 “(도망 못 가도록) 소 꼬리를 단단히 잡고 있어라” 고 명하고 외출했었다. 그 하인이 꼬리를 단단히 잡고 있었지만, 도둑이 꼬리를 자르고 그 소를 몰고 갔다면, 그 하인은 돌아온 주인에게 뭐라고 변명할까? 나는 주인이 말한대로 이 꼬리를 온 힘을 다해 단단히 붙잡고 있었노라고 항변했을 때, 그 하인은 자기 자리를 계속 유지하게 될까? 도망 못 가도록 하는 취지의 말을 거두절미하고 꼬리만 죽자 사자 붙들고 있는 이 하인을 제3자가 동조할 수 있을까?

외눈박이 눈을 가지고 상반되는 말을 거두절미해서 본다면 서로는 공립할 수 없다. 상반되는 말씀들이 한 경전에 담겨 있었던 배경을 외면한다면 경전도 쪼갤 수밖에 없다. 우리는 눈이 두 개이고 귀가 두 개다. 한 물체를 보더라도 양쪽 시선으로 본다. 그래서 거리 감각이 있다. 한 소리를 들어도 두 귀로 듣는다. 그래서 소리의 방향을 감지할 수 있다. 두 눈과 두 귀가 동시에 작동하기에 눈앞의 균형감각이 생기고, 상반되는 내용을 거두절미하지 않기에 역사의 바른 미래 감각이 생기는 것이다.

수에즈 운하처럼 육지를 파헤쳐서 바다 뱃길을 개척하는 것이나, 바다를 메워 간척지 농토를 만드는 것이나, 외눈박이 사고방식으로는 생겨날 수 없었던 것들이다.

정신과 육체가 병들지 않고 서야 어찌 두 눈을 가진 우리가 외눈박이 시선으로만 현실을 바라보겠는가? 어찌 한 쪽 귀를 틀어막고 한 쪽 소리만 듣기로 고집하겠는가?

언론은 특성상 주목을 받기 위해 거두절미하여 제목을 달거나 기사를 쓰는 것이 본래 속성 중의 하나다. 그래서 노련한 정치인은 거두절미의 그물에 걸리지 않기 위해 신경을 쓴다.

마찬가지로 우리 백성들도 외눈박이 시선으로 넘어지지 않기 위해, 두 눈과 두 귀를 충분히 작동해서 거두절미 프레임에 갇히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선거는 끝나도 우리가 살아야 할 세상은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노련한 유권자다~!!

▲윤영호

한국공감소통연구소 대표

‘마음감옥에서 탈출하는 열쇠꾸러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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