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호 칼럼] 사망자 숫자만 기억하지 말고 죽음 자체를 나의 일로 바라보자
[윤영호 칼럼] 사망자 숫자만 기억하지 말고 죽음 자체를 나의 일로 바라보자
  • 윤영호
  • 승인 2020.04.01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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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호 한국공감소통협회 대표
윤영호 한국공감소통연구소 대표

코로나바이러스-19의 감염으로 인해 어떤 나라는 죽은 사체를 미처 처리할 수 없을 정도로 단기간에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사망해야 할지 예측 불허의 상태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지극히 작은 바이러스가 미국 경제의 상징, 뉴욕시티를 순식간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권위의 베일 속에 서있는 로마교황청이 초라하게 보이고, 선진국임을 자부하던 유럽 국가들도 공포에 떨고 있는 것은 매한가지다. 가공할 만한 군사력도, 생사를 초월 한 듯싶었던 종교적 권위자도,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는 감염 앞에서는 무력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죽음 앞에서는 예외가 없기에 세익스피어도 “죽음이란 위대한 평등(Great Equelizer)이라고 까지 말했던 듯싶다.

이렇듯 우리는 누구나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남의 죽음을 보면서 그 대상이 지금 내가 안되었다는 것에 안도한다. 천국이나 극락이 보장되어있다손 치더라도 지금 죽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 생명체의 보편적 심리다. 그래서 불편해도 마스크를 쓰고, ‘사회적 거리 두기’를 스스로 행하고 있다. 언젠가 숙명처럼 맞이할 죽음인데 왜 죽음을 이토록 두려워하는가? 그것은 나 자신에게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미지의 공포이며, 자기 존재가 순간적으로 단절되고 잊혀진다는 것에 대한 근원적 두려움의 감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죽음이 없다면 행복할까?

영국시인이자 극작가 T.S 엘리어트의 대표작 “황무지” 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조롱속에 들어있는 무녀를 향해 아이들이 네 소원이 뭐냐고 물을 때, “죽고 싶어~!”라고 말한다. 신통력이 있는 무녀를 가상히 여긴 신은 무녀의 소원대로 자기 손아귀 속에 있는 먼지의 개수만큼 살게 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래 살게는 되었으나 계속 늙고 쪼그라들어 조롱 속에 갇혀,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인생이란 조화처럼 시들지 않아도 무미건조하고 무녀처럼 늙어 쪼그라들면서 맘대로 죽지 못해도 불행하다는 것이다.

죽음이 없다면 과연 인생을 의미 있게 살려고 할까?

죽음이라는 한계를 의식하기에 인간은 내가 오늘 어떻게 살아야 할지? 삶을 고민하게 된다. 유한 된 시간이기에 막 살지 않고 가치 있는 삶을 처절하게 선택하게 된다. 그러기에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다고 한 듯싶다. 죽음이 삶의 의미를 낳게 하는 배경이 되는 것이기에 죽음이 주는 교훈은 자못 클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그저 죽음을 외면하려고만 한다. 죽음을 쓰레기처럼 처리해야 할 문제로만 여긴다. 그래서 죽음의 처리도 돈과 전문업체에 맡긴다. 그러니 남의 죽음을 통해서 나를 돌아보고 심각하게 삶과 죽음을 의식할 기회를 놓치고 마는 것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에는 없는 자의식이 있기에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할 기회를 갖는다. 다른 이의 죽음을 통해서 그것이 결국 자신의 일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삶의 가치와 방향을 조율하는 기회를 갖게 된다는 견지에서 볼 때, 죽음을 요리조리 피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다. 철저한 노력으로 죽지 않고 살아남되, 앞으로 남은 삶의 의미와 가치를 어디에 두고 살아야 하는 것인지를 함께 숙고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때가 되면 자동적으로 죽을 인생인데 스스로 독선의 함정에 빠져서 몰가치 한 일에 함몰된 채, 지금 죽기살기로 남의 귀한 생명을 짓 밝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윤영호

한국공감소통연구소 대표

‘마음감옥에서 탈출하는 열쇠꾸러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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