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엄마학교협동조합 이사장
김정은 엄마학교협동조합 이사장

며칠 전 김포공항에서 2만원 짜리 비행기 표를 끊어 제주도로 왔습니다. 올 초만 해도 이 좋은 계절 제주에서 ‘한 달 살이’를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근년에는 점차 빈번해지는 사회생활로 일 년 내내 다양한 프로그램을 동시다발로 진행하고 있어서 감히 옛날처럼 한 달씩 시간을 떼어내기가 쉽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코로나 시국을 맞으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예정되어 있던 공식 스케줄이 하나둘 늦춰지나 싶더니 아예 전면 취소를 통보하는 곳도 심심치 않게 늘어났습니다. 핸드폰에 일정 확인용으로 깔아놓은 캘린더 앱이 순식간에 백지에 가깝도록 헐렁해지더군요. 몇 년 동안 땀 흘려 만든 활동 무대가 일순 사라져버렸으니 이걸 참담하다고 해야 할지, 그나마 고정비용 없는 프리랜서인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저조차도 헷갈렸습니다.

이런 상황이 닥치면 자동으로 전투력이 상승하면서 두뇌 회전이 빨라집니다. 무수한 삶의 경험을 통해 외부조건에 맞서 자신을 구해야 할 때가 왔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는 거죠. 밀려드는 세상의 우울을 우물쭈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간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생기를 잃어버리니까요. 생각 한 끗 차이로 변화를 만들 수 있다면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최선을 다해야지요. ‘위기는 기회’라는 주문을 외워가며 묻어두었던 버킷리스트를 적극적으로 헤집었습니다. 어떻게든 지금 가능한 것 중에 해보고 싶은 열정으로 마음이 울렁대는 ‘꺼리’를 찾아보려고요.

고르고 골라 드디어 ‘제주 한 달’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학업 때문에 타지에 사는 대학원생 아들의 우렁각시로 살아보려고요. 이제 더는 장소에 매이지 않을 기본 능력을 갖췄거든요. 그러면서도 혼자 사는 아들네 집에는 선뜻 발을 들이기 어려웠습니다. 쪽방 하나 더 붙은 방 두 개짜리 오피스텔을 구할 때부터 여차하면 나머지 방은 엄마의 제주 사무실로 이용할 수 있다고 너스레를 떨었건만 막상 간다면 달가워하지 않을까 봐 갈 엄두를 못 냈었죠.

그 문턱을 코로나 덕분에 은근슬쩍 넘었습니다. 제주도에 발이 묶여있던 아들이 그럽디다. 사람이 픽픽 죽어 나가는 걸 보니까, 자기 하고 싶은 일을 남 눈치 보느라고 포기하는 건 아닌 거 같다면서 오고 싶거든 오시래요. 그 기회에 자기도 엄마 밥 얻어먹을 수 있으니 괜찮다고. 흠, 이 녀석은 끝까지 엄마 오면 더 좋다고는 안 하네요. 아니, 뭐 그런들 어떻겠습니까. ‘자식 속내까지 그렇게 신경 쓰다간 아마도 죽기 전까지 효도 받긴 어려울 거’라는 그놈의 까칠한 경고를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사실 이 엄마도 저 키울 때 속까지 내내 좋지는 않았으니까요.

그렇게 해서 요즘 제주에서 떠돌게 되었습니다. 잠자코 서울에 있기만 했다면 이럴 때 얼마나 더 우울해졌을까요? 저의 부재로 인해 시원섭섭할 가족에겐 실시간 수다를 떱니다. 함께 일하는 사람과는 영상회의도 하고 메일로 자료를 공유합니다. 넷플릭스, 유튜브, 구글로 정보와 콘텐츠를 누리고, 컴퓨터와 모바일 캠으로 작업을 하면서 쾌적한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십 년째 연마 중인 자기 주도 습관과 인터넷 활용능력에 힘 입은 바 큽니다. 스스로 가두는 것을 하나씩 풀어내며 살아가는 힘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아직은 살만합니다. 오바!

▲김정은

-엄마학교협동조합 이사장

-오지랖통신 발행인

-<엄마 난중일기> 저자

-<50이면 그럴 나이 아니잖아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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